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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상량문 속 숨은 이야기

랑니 2022. 10. 2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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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유적지를 다녀오고 알게 된 내용을 정리해봅니다.

 

 

 

정약용 연표

1. 1762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부 재원과 모 해남 윤씨 사이의 3남으로 출생

2. 1777년 16세 이가환과 자형 이승훈을 쫓아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고 사숙하다.

3. 1784년 23세 이벽과 함께 배를 타고 두미협을 내려가면서 서학에 관하여 처음으로 듣게 된다.

4. 1789년 28세 대과에 급제하고 이어서 초계문신으로 발탁되다. 겨울 배다리의 규제를 작성하다.

5. 1795년 34세 지방의 천주교도를 회유하도록 금정도 찰방으로 외보되다.

6. 1800년 39세 정조의 승하로  고향 소천에서 강학하며 여유당의 편액을 담다

7. 1801년 40세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형 약전은 흑산도, 약용은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강진으로 이배된다.

8. 1818년 57세 9월 고향 마현으로 돌아오다.

9. 18222년 61세 회갑을 맞아 자찬묘지명을 짓고 수종사에서 이웃 학자들과 자주 시사를 갖다.

10. 1836년 75세 홍씨부인과 회혼일에 마현에서 별세하다. 

 

조심하고 경계하는 집, 여유당: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 39살의 나이로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온 정약용은 조심하고 경계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했으나 다음해에 18년간의 유배를 떠나게 된다.

 

1925년의 홍수에 정약용 본가는 떠내려가 없어졌고 현재의 모습은 1986년에 복원을 한 것이다. 

 

정약용은 "다산"외에도 20여 가지의 호를 가지고 있다. 눈썹의 흉터에서 따온 삼미, 생가 서쪽에 있던 산의 이름을 딴 철마산인등등. 7살부터 시를 짓기 시작해 10살 이전에 자신의 시를 모은 시집을 만들 정도로 영특함을 내밀기 시작했는데 급제하기 전까지 총 4번의 시험을 보았는데 이것을 민망하게 여겼다고 한다.

 

1784년 4월, 23살의 성균관 유생이던 정약용 선생은 사돈인 이벽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두미협 배 위에서 형인 정약전과 함께 서학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 선생은 서학에 심취하여 모임을 자주 갔다가 1791년 천주교 신자 윤지충이 신주를 불태운느 사건을 계기로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지하자 자신은 천주교가 아님을 선언했으나 1801년 정조가 승하한 후  반대파인 노론의 견제로 유배길에 오르게 되고 조카사위인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양에서 고문을 받는 고초를 겪게 된다.

 

정조는 성균관 우수 학생들에게 상을 주는 행사에서 정약용을 처음 만나 깊이 신임하여 중책들을 맡겼고 천주교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는 지금의 충남 청양으로 보내 화를 피하게끔 하였다. 1800년 6월12일 여유당에 앉아 달을 구경하던 정약용에 규장각 관리가 찾아왔고 임금의 부름에 감격했지만 보름 후인 28일에 정조가 승하하면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사형 직전까지 갔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지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처음 5년간은 한 주막집 골방에 머물면서 담백한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 신중한 행동을 일러 사의재라는 이름을 지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후에 자기 삶과 저술들을 정리한 책으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이 있으며 이 후에는 한강을 건너다니며 신작, 김매순, 홍현주 같은 당대 이름난 학자들과 학문을 즐기며 남양주 수종사에서 시 짓기 모임을 자주 가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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