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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본문

책을 필사해보아요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랑니 2021. 1. 4.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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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허리가 굽도록 부친 그 전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드신다. 

 

죽은 사람을 챙기다가 산 사람이 죽게 생겼다. 

 

참으로 비효울적인 짓거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죽으면 제사 같은 건 절대 지내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날 내가 죽어 문득 그리워진다면, 그때는 소공동 조선호텔 스타벅스에 가서 뜨뜻한 라테나 한잔 시켜주라.

 

"얘가 생전에 여기에서 이걸 마시는 걸 참 좋아했었지" 하면서

 

"그래도 라떼는 실컷 마시고 죽었으니 잘 살다 간 거지 뭐야" 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건물주가 되어 건물 일 층에 스타벅스를 입점시키렴" 하면서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엄마, 아빠가 제일 싫어하는  옷을 입고 터덜터덜 집에 간다. 

 

청바지에 헐렁한 까만 니트, 햇수로 오 년째 입고 있는 무인양품 패딩을 대충 걸치고 멀고 먼 집을 향해 가는 중이다. 

 

엄마는 나의 무인양품 패딩을 "극혐"한다. 

 

여성스럽지 않고 칙칙하다는 이유에서다.

 

아빠는 나의 청바지를 "극혐"한다. 

 

어른스럽지 않고 너무 캐주얼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 부치러 가는데 정장 입고 갈 일 있나?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지하철을 타고서 경기도 평택시로 내려간다. 

 

가양역에서 9호선을 타고 노량진까지 가서, 노량진에서 1호서으로 갈아타고 평택역에 내린다. 

 

노량진역 에스컬레이터, 내 앞에 선 남자와 여자가 손을 꼭 잡고 있다.

 

남자는 회색 코트를, 여자는 분홍색 코트를 입었다.

 

남자는 못 생겼고, 여자는 그저 그렇다. 

 

명절 연휴 첫날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손을 잡고 있다니.

 

지난달에 결혼한 모양이지. 

 

아니나다를까 여자의 손가락에서 다이아 반지가 빛나고 있다. 

 

여자여, 너는 시댁에 가는가, 시댁에 도착하면 너희는 붙잡은 그 손을 놓게 되겠지.

 

이제 왔니? 좀 빨리 오지 않구선?

 

너는 시어머니의 빈정거림에 서둘러 분홍 코트를 벗고 앞치마를 두를 것이다. 

 

그러고는 거치적 거리는 반지를 빼내어 주머니에 넣겠지.

 

너의 다이아 반지는 컴컴한 주머니 속에서 빛을 잃는다. 

 

너의 손을 절대 놓지 않을 것 같던 남자는 이제 너의 손이 아닌 리모컨을 잡고서 네가 아닌 텔레비전을 본다.

 

여쟈여, 넌 부치러 시댁에 가는가.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여기는 1호선 명학역이다. 

 

지하철 안에는 남자 반, 여자 반, 젊은이 반 노인 반이다. 

 

모두가 가족을 만나러 간다. 

 

이번 추석에는 집에 내려가고 싶지 않다. 

 

매번 명절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그리하고 싶다. 

 

호텔 방 하나 잡고 혼자 처박혀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손으로는 아무 말이나 쓰고 싶다. 

 

텔레비전에선느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난 그런 거 전혀 부럽지 않다. 

 

얼마 전 광화문을 거다 우연히 만난 캐나다 남자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이 지역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지금 어딜 가십니까? 등등

 

영어로 예의 있게 거절하는 법을 몰라 그냥 번호를 알려줬다.

 

그는 매일 아침 나에게 카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지만 나는 그것에 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이고 싶기 때문이다. 

 

절대로 내가 못 생겨서가 아니다. 

 

그냥 나는 누구와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나는 전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나는 전을 부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간다. 

 

나는 전을 부치기 위해 쉬지도 못하고 고향에 내려가는 중이다. 

 

나는 ㅈ같은 전을 부치기 위해 인생의 하루를 허비해가며 고향에 내려가는 와중에 화를 내고 있다.

 

나는 전을 얼마나 부쳐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부쳐야 할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부치라고 하니까 전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가며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그까짓 전 안 부치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집에 안 내려가다고 말하면 내일이라도 죽을 껏처럼 힘 빠진 목소리

 

를 내는 엄마때문에 그 ㅈ같은 전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엄마라고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어.

 

엄마라고 전 부치고 싶어서 부치겠어.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나는 그러한 엄마의 딸로 태어난 죄로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난 내 딸이 그깟 전 부치는 거 가지고 이렇게 구구절절 세상 다 산 것처럼 글 쓰는 꼴 못 본다. 

 

그러므로, 절대로 절대로 누가 때려죽인다 하더라도 자식을 낳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는 바이다.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왔다.

 

나 이제 전 부친다.


출처: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글/그림 이주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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